2차대전의 秘話
한국이 미국의 은혜를 저버려선 안 되는 이유
이 글은 과거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들었던 내용과, 최근 인터넷 등을 통해 해외에서 얻은 기록물 등을 토대로 제 나름대로 엮은 내용으로서, 우리의 역사교과서에 는 등장하지 않은 내용이 많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모~모>
1. 2차대전 직후 연합국의 일본영토 분할계획.
1941년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승
리가 가시화되고 일본의 패전이 임박할 무렵, 미국 등 연합국은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범국 일본에 대해서도 4개 연합국들(미
국, 영국, 소련, 중국)이 각각 일본 영토를 분할통치할 계획을 세
연합국의 일본분할 계획도 북부 홋카이도(北海道)와 혼슈(本州) 북부
는 소련령, 혼슈 중부와 오키나와(沖繩)제도는 미국령, 혼슈 서부와 큐슈(九州)
섬은 영국령, 남쪽 시코쿠(四國)섬은 중국령, (소련은 종전직전 일본과 불과 5
일 동안(8월10일~15일) 싸우고서 저렇게 넓은 영토를 차지하려 한 걸 보면, 스
탈린의 영토에 대한 욕심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에 반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 지도자
장개석(蔣介石)이었다. 그는 ‘비록 전범국이라 하더라도 이미 패전
한 국가의 영토를 전승국들이 분할통치 한다는 것은 동양인의 도
덕적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러한 장개석의
반대로 일본의 분할통치 계획이 무산되자 크게 당황한 쪽은 바로
소련의 스탈린이었다.
원래 일본과 1946년까지 ‘전시 중립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이 일
본의 항복이 임박한 시점(1945년8월10일)에 일본과의 조약을 깨
고 부랴부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던 이유는 뭘까? 바로 일본의
분할통치에 따른 전리품을 노렸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와 마찬가
지로 일본의 북부영토 일부를 차지할 것으로 믿었던 스탈린은 분
할계획이 무산되자 크게 실망한 나머지, 임자 없는 전리품인 한반
도에서라도 영토적 욕망을 채우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때
마침 전후 처리문제로 복잡해 하던 미국은 더 이상 소련과의 불협
화음을 조성하지 않으려고 조그만 땅 한반도의 북부를 사실상 소
련에게 양보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의 분할은 사실상
일본의 분할을 대신하여 뒤집어 쓴 희생양이 된 것이다.
2. 일본의 집요한 영토야욕.
나는 여기서 미국의 소련에 대한 양보를 결코 섭섭하게 생각하려
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라도 일본의 ‘영원한 영토’가
될 뻔 했던 한반도를 일본에서 구해준 것만으로도 미국에 대해 대
단히 고맙게 생각한다.
일본은 패전의 기미가 역력해 가던 1945년 6월경까지도 영토에
대한 야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이 소련의 스탈린에게
미국과의 화전(和戰)을 중재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내건 대미(對美)
항복의 조건은 ‘기왕에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일본의 정복지는
일본영토로 인정하되, 서양국가가 지배하다가 최근 일본이
점령한 정복지에 대해서는 독립시켜 준다.’는 조건이었다.
이에 비해 미국측(루우즈벨트 대통령)의 입장은 처음부터 일관
되게 ‘일본의 영토는 혼슈,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 등 4개 도
서에 국한되고, 기타의 모든 일본의 정복지는 자치독립을 보
장해야 한다’ 였다.
이러한 미국측의 ‘항복조건’은 1945년7월26일 포츠담 선언문을
통하여 일본에 최후의 통첩으로 전달되었으나, 일본은 ‘그렇다면
조선반도만이라도 일본영토로 인정해 달라’며 끝까지 영토야욕을
포기하지 않다가 결국 8월6일에 나가사키에 이어 히로시마에까
지 인류최초로 가공할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서야 모든 것을 포
기하게 되었다.
* 註 : ① 기왕에 일본이 점령한 지역이란 / 한반도, 만주, 중국 일
부, 사할린 섬 등.
② 서양이 지배하다 일본이 점령한 지역이란 / 베트남 등
프랑스령 3국, (태국), 말레이, 싱가폴, 미얀마, 인도네
시아, 태평양 도서국 등 (필자 추정)
3. 미국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이유.
전후 일본의 처리문제가 처음으로 거론된 카이로선언(1943년) 당
시부터 한반도 독립을 일관되게 주장한 이는 바로 미국의 루우즈
벨트 대통령이었다. 영국의 처칠과 중국의 장개석은 자국의 영토
보전이 더더욱 시급했기에 그런 약소국가의 독립같은 건 신경쓸
겨를도 없었고, 소련의 스탈린은 독립은 커녕 어떻게 하면 소련의
위성국가를 많이 만들까? 하는 문제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일본이 ‘조선반도만 일본에게 양보해 달라'
는 최후의 항복조건을 제시했을 때, 미국이 ‘원자폭탄 사용하지
않고 이 정도의 선에서 일본과 타협하자’ 라고 마음먹었더라면
한반도의 독립은 더더욱 요원하기만 했을 것이다.
4. 역사의 가정(假定)
1) 만약 한반도가 현재 일본의 영토로 남아있다면.
당연히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구상에 존재
하지 않을 것이고, 일본의 ‘국사(國史)’ 교과서에는 아마 다음과 같
이 날조된 한반도 역사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가정해 본다. “태초
에 조선반도는 대륙에 붙어있지 않고 대마도(對馬島)를 통하여 일
본열도에 붙어 있었으나, 그 후 지각변동으로 반도지역이 분리되
어 대륙에 들러붙었다. 그 후 수천여년 동안 반도인들은 중국대륙
의 속국으로 고생하다가 20세기에야 드디어 대일본 열도(大日本
列島)의 품안으로 원상복귀 되어 열도(列島)와 반도가 통일을 이루
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끔찍한 얘기다.
2) 만약 일본영토가 연합국의 의도대로 분할되었더라면.
현재까지 소련령은 철의장막으로 분리되어 남북 2개의 일본으로
분단되어 있을 것이다. 북일본의 국호는 '북해도(北海道)인민공
화국' 정도. 아직까지 독일처럼 통일은 이루지 못하고 (왜냐하면
괴뢰 일본인들도 종주국에 대한 충성심이 강할 테니까), 다만 근
래에 와서 북해도 인민공화국은 체제전환이다 통일이다 하는 문
제로 뒤숭숭한 상황일 것이다.
반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은 채 미국의 지원하에 국력이 세계
6~7위 정도로 자본주의를 만끽할 것이다.(스탈린은 원래 한반
도 분할은 고려하지 않았음)
5. 일본의 지리교과서를 보고.
80년대엔가 일본에 갔을 때 한 서점에 들렀는데 일본 중학교의 지
리교과서가 눈에 띄었다. 책 내용 중 ‘조선반도(朝鮮半島)’ 부분을
얼핏 읽어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조선반도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국토는 일본의 2/3정도, 인구는 절반 정도
인데 좁은 국토가 남북 2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남쪽은 ‘대한민
국’에 자본주의를, 북쪽은 ‘조선.......’에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같은 민족인데도 불신감이 강하여 1950년에는 동족간에
전쟁을 일으켜 유엔의 개입으로 겨우 휴전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읽고 있노라니 전후 일본에서 2년간 군정통치를
담당했던 맥아더 원수의 논평이 생각난다 ‘일본인들은 마치 13살
짜리 어린애 같다’는. [조선반도의 분할]을 어떻게 저렇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남의 일처럼 기술하고 있을까? 35년간의 야만적인
지배도 억울했는데, 거기다 전범국인 자신들의 영토분할까지 대신
뒤집어 쓴 억울한 ‘희생양 ’ 아닌가 !
일본정부는 전후 일본의 영토분할을 막아준 중국의 장개석 총통
에게 지극히 감사하다면서 매년 정초마다 사은(謝恩)의 진사(陳謝)
사절단을 파견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곤 하다가 그 후 장(蔣)총통이
대만으로 쫓겨나 세력이 약해지자 흐지부지해 버렸다. 그런 일본
에 대해 근래 미국에 이어 유럽의회조차 ‘일본은 2차대전 당시 군
위안부 동원에 대해 보상과 사죄해야 한다’는 결의안 채택을 보면
서 ‘13살짜리 일본인들’에 대한 측은한 동정심마저 든다.
6. 결론.
내가 이 글의 쓰는 목적은 한마디로 ‘미국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내부에선 걸핏하면 ‘반미, 반미’ 떠들어 대는
데, 내 눈에는 ‘배은망덕(背恩忘德)’으로 밖엔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교과서에 언급되지 않은 숨겨진 세계사의 비화(秘話)를 알진
대, 어찌 미국에 대해 그렇게 섭섭하게 말할 수 있으랴! 미국이 없
었더라면 대한민국은 결코 없었다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모~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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