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ssues

중문과 동아리의 ‘전설’ 이야기

모~모 2016. 12. 18. 10:15

고려대 문과대 교우회보「시계탑」기고문
2011년 7월 8일 
 

적성과 관계없는 엉뚱한 학과를 택해야 했던 나는 ‘학과선택을 잘못하여 인생을 망친 전형적인 불행아’라고나 할까! 어릴 적부터 외국어에 광적인 호기를 보였는데도 엉뚱하게 고등학교에서 문과가 아닌 이과를 택한 것이 내 인생을 그렇게 망가뜨려 놓을지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1975년 나는 본의 아니게 이과대학(생물학과)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마음은 항상 문과대학 외국어학과 쪽에 있었다. 학창시절에는 동아리라는 것에 가입할 생각도 못했는데 졸업 후 개인적으로 중국어 때문에 모교에 잠시 들렀다가 남재우 후배(중문78)를 만나면서 동아리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 것이다.
1983년 여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중문과 동아리 ‘讀者文摘會(독자문적회/ 현재의 ‘중국연구회’ 전신)는 활달한 막걸리 형의 남후배가 창설하여 안내 포스터 붙이고 다니느라 정신없는 그를 내가 틈틈이 도와주었다.
모임에 참석해보니 중문과 재학생 20여명 정도가 참석하곤 했는데, 당시 동아리에는 여학생이 없어서 마당발 남후배가 멀리 이화여대와 성신여대까지 가서 여학생들을 섭외해 오기도 하였다.
나는 중국어를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어려서부터 외국 방송을 들으면서 독학으로 익혔던 터라, 청취력과 발음은 재학생들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문법만은 문외한이었기에 이 부분을 재학생 후배들에게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동아리 교재는 미국의 시사잡지 ‘Readers Digest’ 중국어판인 ‘讀者文摘’이었는데 동아리 이름도 책이름을 따서 ‘독자문적회(讀者文摘會)’라고 지었다. 미리 선정된 회원이 앞에 나가 한 단원씩 강독을 주도하면 나머지 회원들이 질의응답하는 식으로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이었다.
한 번은 내 차례가 되었는데 강독할 내용이 당시 미국에서 널리 회자되던 성인병 관련 내용이었다. 당연히 ‘암, 당뇨병’ 등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문제는 ‘암’이라는 중국어 단어 ‘癌症(암증)’의 발음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만과 단독 수교국으로 시중에는 쓸 만한 중국어 사전도 없었으니 학생들은 그저 학교에서 교수님의 강의와 스스로의 감(感)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 2,3학년인 재학생들에게 생소한 ‘癌症(암증)’이라는 단어를 학교 교육도 받지 못한 내가 ‘아이정’ 이라고 발음하니 학생들의 ‘이의제기’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올 법도 했다.
우리말 독음이 ‘암증’이면 추측컨대 중국어로는 ‘옌정’은 되어야지 어찌 ‘아이정’이란 말인가? 만약 중국어 발음이 ‘아이정’ 이라면 우리말 독음은 당연히 ‘애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후배들의 열화같은 추측성 이의제기에, 문법에 문외한이던 나로서는 그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집에 와서 뒤져보니 마침 ‘미국의 소리’ 중국어 방송의 성인병에 관한 방송을 녹음해둔 테이프가 보였다. 북경 표준어를 쓰는 화교 아나운서가 “아이정/ cancer”라고 영어로 설명까지 곁들인 것이었다. 또 다른 증거물은 일본 아이찌(愛知)대학에서 출판한 中日사전이었다. 당시 내가 일본에서 구입한 사전이었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륙식 약자까지 표기한 그 사전에는 ‘癌症’ 의 발음을 분명히 ‘아이정/aizheng’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증거물이 어디 있으랴! 다음 내 차례 시간에 나는 녹음테이프와 녹음기, 中日사전을 모두 동원하여 후배들 앞에서 틀어주고 사전도 보여주며 확인시켰더니 모두들 할 말을 잊고.. 이리하여 그날 그 문제는 일단 나의 'KO승' 이었다.
몇년전 50을 넘긴 나이에, 나는 당시 중문과의 한 후배로부터 새로운 후문을 전해듣게 되었다.
“당시 선배님의 그 사건은 ‘전설적’이셨습니다”
“웬? 전설적이라니?”
그 후배가 들려준 후문은 이랬다. 당시 동아리에는 大 高大와 梨大 중문과 2∼4학년생이 30여명이나 있었지만 이과대학에서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의 ‘癌症’ 발음을 이해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으니 중문과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다음날 즉각 학과 교수님을 찾아가 질문 드렸는데, 어느 젊은 교수님의 대답이 시원찮아 다시 중국에서 오래 살다오신 老교수님께 질문하니 “그건 분명히 ‘아이정’이 맞아!” 하시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근 30년 만에 그 동아리의 ‘전설’ 칭호를 뒤늦게 전해듣게 되었다. ㅎㅎ